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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8:7)
2022-06-13 21:10:46 | 김현식 | 조회 482 | 덧글 0
언제부터인가 기독교인들의 기업 가운데
흔하게 볼 수 있는 말씀이 바로 욥 8:7이 아닌가 싶다.


직장이건, 기업이건, 하물며 각 가정에서도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성경구절로 자리잡아

마치 성도들에게 큰 위안이나 되는 것 마냥 버티고 서 있다.

마치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면서
또한 정말 힘이 되고 크게 될 것 같은
꿈을 꾸게 하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하지만, 전후사정을 알고나면 어떠할까.

1. 이 구절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하신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선지자중 한 사람이 말한 것도 아니다.

욥기서의 전반부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욥은 구약의 의인 중 대표적인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하나님이 흡족해하실 정도로 하나님 앞에 순결함을 지키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욥1:1)


이런 욥을 하나님은 사단에게 자랑으로 삼으셨고
이에 사단은 욥의 의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산과
그의 건강 때문이라는 것을 이유를 들어
결국 하나님의 허락하에 욥의 의는 시험받게 된다.


결국 욥의 전 재산과 식구들, 그리고 그의 육신 또한
해함을 받게 되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욥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위 구절을 말한 ‘발닷’이라는 인물이다.

욥의 친구들 역시 성경 상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사람들로서 욥과의 변론에 있어
욥의 상황을 나름대로의 신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두 번째로 변론하는 발닷은
욥의 고난을 원인에 두고 있었다.


2. 발닷의 인과관계적 신앙해석의 오류.
발닷은 욥의 환란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결과로 보고 있다.(욥8:3)
그러나 이 주장은 인과관계(因果關係), 즉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는 식의 해석으로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어떤 고난이 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묻기 보다
인과관계의 도식 속에 그 문제의 해결점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뉘앙스는 불교에서의 업보(業報),
무당이나 점술가들에 있어서의 조상탓 등으로
해석하는 관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욥기서의 전반부 내용은 분명 하나님께서
욥의 의로움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사단에게 허락한 시험이다.

바로 이 점이 “발닷의 신앙해석 오류”가 된다.

발닷의 주장을 보면 욥의 환란에 대한 원인을
그의 자녀들에 대한 죄로 보고 있다.(욥8:4).


신약에 있어서도 이러한 유사한 신앙해석의 오류가 등장한다.
요9:1~3절 이하의 내용을 보면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며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한다.

“이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까?
자신의 죄인지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인지..”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것은 결코 인과관계의 도식이 아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다.

3. 환란을 피하는 방안(?)
더욱이 발닷은 그 환란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까지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께 부지런히 구하며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된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에 가서 열
심히 철야기도하고 부르짖으며...
그러면 해결된다는 공식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지금 진행중이다.
그리고 그 시험의 결과로서
욥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자 함에 있었다.


그런데 욥의 친구 빌닷은 오히려 그러한 시험을
멈추게 할 방도를 말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취지로 욥에게 건넨 말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구절이다.

그러면 지금의 “미약”은 발닷의 말대로라면
죄의 결과이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게 되고,


“창대하리라”는 개념은 사람이 하나님께
부지런히 구하며 빌고 또 자신이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크게 성공한다는 공식이 나오게 된다.


이것으로 결국 신앙은 사람의 노력 결과라는 오류를 생긴 것이다.
신앙적 노력과 사업성공이 비례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노력이 과연 하나님의 섭리를 앞설 수 있을까.

지금의 고난 속에 우리는 누구를 보고 있는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님을 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는
심히 창대함을 꿈꾸며 ‘발닷의 위로’를 받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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